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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_시국

아들이 본 노무현

[아들이 본 노무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제가 아버지를 신기한 듯이 바라본 적은 없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 와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한참 웃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생각하기에 유명한 정치인의 집이면 어머니가 항상 한복을 입고 계시고, 마당엔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황소만한 셰퍼드를 몰고 다니고, 아버지는 항상 전화를 하느라고 바쁜, 그런 모습이 아닐까 했다고 하더군요. 불행히도 그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어머니는 주무시다 츄리닝을 입고 문을 열어 주셨고, 아버지는 런닝에 잠옷바람으로 신문을 읽고 계셨었습니다.

친구의 환상을 깨버린 건 미안하지만 결국 다른 정치인들의 집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정치인이라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고, 가족은 가족이라 평범한 생활의 면에선 신기할 것도, 다를 것도 없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은 정치인이라고 하면 꽤나 이질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다른 정치인을 가까이서 본적은 몇 번 없습니다. 오다가다 가끔씩 인사를 드리는 경우가 남들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기한 마음까지 가시는 것은 아닙니다. TV에서나 보던 사람들이니까요. 그것도 그냥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아닌,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하는 분들이니 조금 신기하게 보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볼 때에도 저처럼 약간은 신기한 눈으로 보는 게 당연한 듯 합니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88년도 이후의 일이고, 그전까진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가족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엔 주로 자장면 외식을 하고, 조금 나이가 들어선 언양불고기 외식을 하는 정도의 영화를 누리면서 부모님이 말다툼 하실 때엔 옆에서 징징 울기도 하고, 친구한테 맞고 오면 '때려줘라' 라는 훈계도 들어보고, 동생 콜라 뺏어먹었다고 혼나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간혹 가다 아버지는 퇴근하시면서 일감을 보따리에 가득 들고 오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저녁 드시고는 곧바로 서류를 들고 마루의 탁자에 앉으시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에 나가보면 그때까지 아버지는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혼자서 무언가를 쓰고 계시곤 했는데, 사실 지금까지도 그 뒷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남아 기억이 나곤 합니다.

잔정 없는 경상도 남자답게 생일선물 같은 걸 아버지께서 사주신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선물 사 주셨다고 하더라도 당신께서 기억을 못하고 계실 겁니다. 딱 한번, 퇴근하시면서 고우영 화백이 그린 어린이용 만화 삼국지 5권을 사 오신적이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수십 번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년 전에 아버지한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전혀 기억을 못하시더군요. 아마 지금은 또 기억 못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아버지를 자상하고, 배려하고, 잔정이 뚝뚝 넘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런 스타일은 아버지와 거리가 멉니다. 아버지의 그런 점은 어머니나 동생에게 다소 불만인 듯 하지만 저로선 별로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하기가 그렇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있었던 일 중에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름철에 엉덩이를 맞은 일입니다. 제가 몇 살 때 인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아마 국민학교를 막 들어갔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당시엔 부산 남천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여름철 더울 때면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마루에서 가족들이 함께 자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무지하게 더운 날 밤에 손님들이 오셨는데, 제가 손님들 계신 자리에서 마루에서 잘 거라고 마구 떼를 썼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손님들이 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손으로 제 엉덩이를 불이 나도록 때렸는데, 정말 다행으로 외할머니가 옆에 계셔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마루에서, 외할머니 품에 안겨, 훌쩍대면서 잠을 자려고 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웅얼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정말 아버지가 흐느끼시는 소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땐 왠지 마음이 너무 아파 한참을 더 대성통곡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 때 아버지가 흐느끼셨는지, 흐느끼셨다면 아들이 말썽부린 게 속이 상해서 우셨는지, 아니면 절 때리신 게 마음이 아파서 우셨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저 나름대로의 비밀로 그냥 가지고 있는 기억입니다. 아마 아버지는 기억도 못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때 어린 맘으론 '아, 아버지가 날 때리고 나서 저렇게 흐느껴 우시는 구나' 하곤 가슴이 너무너무 아팠습니다. 지금에 와서 아버지에게 '그때 어떤 마음이셨어요? 과연 우시긴 우셨어요? ' 하면서 물어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어린 날의 진한 감동을 그런 식으로 날려버리긴 싫어서 그냥 혼자 가끔씩 떠올려 보곤 하는 기억입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매를 맞은 적이 있지만, 뭐 그런 이야기는 부끄러워서 그만 하렵니다.

위의 일이 있었던 무렵의 일이기도 한데, 혹시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중에 '공문수학'이라고 아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일정한 양을 풀어야 하는 수학문제집이었는데, 문제는 이 공문수학이 사채이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쌓여간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에게 한참을 혼나고 몇 달치 쌓인 공문수학을 한꺼번에 풀어야 하는 날이 왔는데, 너무 하기 싫어서 나중엔 울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그러고 있으니까 밤 10시가 넘어 - 당시엔 9시가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 아버지가 절 부르시더니 옷을 입어라 하시더군요.

전 드디어 아버지가 절 버리러 가시는구나 생각하곤 바싹 얼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손에 끌려 제 생애사상 가장 밤 늦은 시간의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 가게며, 포장마차며, 행상들에서 이것 저것 사시면서 몇 시에 나와서 몇 시까지 일을 하는지를 물어보며 제 손을 잡고 야간 행군을 계속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살기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한번 네 눈으로 보아라 하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땐 제가 너무 어려서인지 그러한 의미를 느끼기엔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참을 그렇게 다니다가 집에서 너무 멀어졌을 때 아버지와 택시를 잡아타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당시 무슨 건물인지 몰라도 전광판시계가 2시를 넘었던걸 본 기억이 납니다. 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신기한 숫자였습니다. 덕분에 전 다음날 학교에 지각을 했구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는 준마에 채찍을 가한다던가, 사자 새끼를 절벽 밑에 떨어뜨린다던가 하는 스타일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걸 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하셔서 공문수학을 그만 둘 수 있었거든요. 이후에도 아버지는 제가 싫다고 하는 일을 강요하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부까지도요.

사실 요즘은 아버지가 그 점에 대해 후회를 좀 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준마에는 채찍을 가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합니다. 제가 준마인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시 공문수학을 그만 둘 수 있었던 건 지금도 무척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돈 안 벌어 오는 아버지



지극히 평범한 우리 가족의 삶이 약간, 아주 약간 이상해진 것은 아버지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달라졌다곤 하지만 사실 저에겐 그렇게 변한 게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다툼하는 일이 늘어났고, 어머니가 걱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시는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제가 국민학교 고학년 무렵에 이른바 '부림사건' 이라는 것을 계기로 아버지가 사회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것이 변화의 발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점점 사회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셨고, 제가 중학교에 갈 무렵엔 아예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으시고 사회운동에만 전념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돈을 ‘안’ 버시는 생활이 계속되었고, 경제적인 문제는 어머니에게 큰 스트레스 였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이서 말다툼하는 모습도 여러 번 봤구요. 본시 아버지가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신 게 아닌데다 변호사 생활 역시 그렇게 오래 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집에 투자해 놓은 부동산이 있었다던가, 숨겨둔 거금이 있었다던가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으셨던 것도 요즘은 실감이 납니다.

그러나 저로선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계속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겨우 국민학생인 저에게 부모님이 무슨 고민을 토로하신 것도 아니고, 저도 꽤나 둔한 편이라 그저 하루하루 평범하게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축구골대에서 떨어져 팔도 한번 부러지고, 몰래 만화방이나 오락실을 갔다가 혼나기도 하고, 제 인생에 지금까지도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렇게 지낸 시간들이었습니다.

간혹 가다 밤 늦게까지 손님들이 집에서 말씀을 나누시는 일이 있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림사건’에 관여된 여러 대학생들과, 사회운동을 하시던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를 하신 이후 아버지가 쓰신 글들이나, 아버지를 소개하는 글들을 보면 ‘부림사건’을 일종의 사회적 각성의 계기로 보는 듯 합니다. 또 신문기사의 프로필 등을 보면 간단하게 한 줄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이라고 적혀져 있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엔 이 후의 일들은 정말 일대 격변이었습니다.

요즘에 들어 제가 그 때를 떠올려보면 아버지가 그때 특별히 사회의 구조적인 면에 각성했다고 여기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사람을 때리고, 고문하는 권력에 대한 분노’가 아버지를 사회운동의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노가다 공사판을 거칠 정도로 어려운 생활에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사회의 어두운 곳을 다시 봤다 라던가, 부조리에 눈뜬 귀공자형 엘리트였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솔직히 말해 당시의 대학생들이 조금만 맞아서 눈에 멍이 든 정도였다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면서 ‘조심 좀 하지’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문피해자였던 대학생들은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의협심이 있다거나, 불의를 보고선 참지 못하는 정의한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도록 되어있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써놓은 글을 보면 ‘발톱, 손톱이 죽어있고 온몸에 멍에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등등 조선시대 국문장 분위기의 묘사가 나오곤 합니다. 저로선 당시 아버지께서 사회운동이라는 형태로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그저 ‘때리지 마라!’라는 정도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정치체제, 경제구조, 이데올로기 등의 거창한 이야기는 별로 하시질 않습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하시면서도 표어가 ‘사람 사는 세상’이었던 걸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당시에 그런 쪽에 관계된 이야기를 저에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선 아버지가 사회운동을 어쩌다가 하시게 되었는지, 하신다면 왜 하시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당시의 일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지 아버지의 심경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어머니와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보인 민감했던 반응들은 기억이 많습니다.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말다툼을 하시곤 하셨는데, 어머니로선 아버지의 사회운동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기보다는 생계까지 내팽게치고 사회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불만이셨던 것 같습니다. 또 간혹 친척분들이 오셔서 걱정하는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책망하시던 이야기도 많이 듣곤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가 87년도였습니다. 아버지의 약력을 확인해보면 87년 1월에 ‘노동법률상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노동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고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노동자 총파업, 6월 항쟁, 6.29선언, 대선등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널린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박종철 씨와 이한열 씨 사건으로 인해 6월에 대규모 시위가 잦아지자 아버지는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동생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 최루탄가루가 흩날리는 거리를 헤매기도 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TV뉴스를 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시위에 참여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장면들은 장관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람들 중의 어딘가에서 메가폰을 들고 연설하고 계신다는 걸 생각하면 저도 나가 구경하고 싶은 맘이 굴뚝이곤 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도끼눈을 하신 채 혼을 내지만 않으셨어도 꼭 나가서 구경하고 싶은 장면들이었습니다.

6.29선언이 있자, 어느 정도 시위는 조용해졌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정말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시지 않으시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대우조선소 파업현장에 가셨던 모양입니다. 가끔 메가폰을 들고선 아주 과격한 모습으로 몇 번 뉴스장면에 나오시곤 했는데, 뭐라고 하셨는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몇 번 나오시더니 어느날 ‘구속’ 되셨다는 내용이 TV에 나왔습니다. 그 때 아마 외할머니와 몇몇 친척분들이 집에 오셔서 함께 저녁 9시 뉴스를 본 걸로 기억합니다. 미리 라디오 등을 통해서 소식을 듣곤 오셨던 것 같은데, 뉴스에 내용이 나올 때 그분들 한숨소리와 탄식소리가 지금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문제는 제가 그때 ‘구속’이 뭔지를 정확하게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큰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아버지가 감옥에 가신다고 하는데, 도저히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몇일 지나서인가 어머니는 도시락을 준비하셨고, 동생과 저를 데리고 구치소로 아버지 면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수인복을 입은 아버지를 봐도 무언가 말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만이 들고, 도저히 현실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담담한 목소리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때 제가 걱정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로선 아버지가 종종 집에 잘 들어오시지 않는 일이 많았었고, 당연히 며칠 지나면 또 집에 오셨다가 옷 갈아입고 나가실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다소의 어색함 외엔 걱정이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시의 구치소 분위기는 상당히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병원 같기도 하고, 장례 치르는 곳 같기도 하고, 조용하고 약간은 어두운 그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구속적부심을 통해 20여 일 정도 만에 구치소에서 나오셨을 때 저는 아버지가 무죄판결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예전의 생활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우리집 주변에 사복 형사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그분들이야 아버지가 도주 할 것을 염려하였겠지만, 덕분에 우리집과 이웃들은 아파트 문을 잠글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방범이 확실해서 좋은 면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일을 그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도 있고 해서, 동생과 저는 그 형사분 들에게 꼬박꼬박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그게 형사분들에겐 그렇게 이상하고 쑥스런 인사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잡아가려고 진 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아들이라 생각하니, 그제서야 저도 조금 우습기는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집 앞, 아파트 풀밭에서 아버지가 형사들을 둘러 앉혀 놓고는 무언가 토론을 하는 광경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주변 이웃들이 봤으면 정말 재미 있었을 광경이고, 형사들을 파견한 간부들 입장에선 시말서 사유였겠지만, 저로선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뒤에 제가 형사정책이라는 과목을 공부하면서 ‘사상범들은 무조건 독방’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웃은 적도 있습니다.




유명해진 아버지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던 간에 제 생활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대우조선소 파업현장에 가셨다가 제 3자 개입금지 조항에 의해 구속 당하시고, 20여일 만에 구속적부심을 통해 나오셨다가, 12월쯤에 변호사 업무정지명령을 받으시고,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계진출 권유를 받으시는 등 아버지께선 여러 가지 사건들에 당면해 계셨지만, 저로서야 평범하게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였습니다.

전 88년도에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 해 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아버지는 부산 동구지역에 출마하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만 하더라도 선거 분위기가 온화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선거 사무실은 만약을 위해 각목과 야구방망이, 소화기 등을 항상 비치해 두고 있었었고, 아버지에겐 경호원이 두 명씩이나 따라 붙었습니다. 가끔 상대편 운동원들에게 뭇매를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중구에서 출마하셨던 김광일 변호사의 아들은 실제 납치도 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동생까지 경호원을 두고 싶어 하셨는데, ‘필요 없다’라는 아버지 한마디에 포기 하셨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해도 ‘경호원’과 함께 학교에 가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라서 당시 아버지가 잘 말리셨다고 생각하는 일 중의 하나 입니다.

1988년 부산 동구에서 아버지가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시자, 어머니는 이사 준비 -가끔 국회의원들은 당연히 그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만나곤 하는데, 현실적으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를 하셨고, 우리 가족은 서울 여의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새로 전학한 학교에선 교실에 TV가 있었습니다. 13대 국회가 개회된 이후 청문회의 열풍이 몰아쳤는데, 관심이 많으신 선생님들께선 수업시간에도 학생들에게 청문회를 보게 하셨습니다. 어느날 오전 무렵 수업시간에 우리 반 모두가 청문회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TV에 나오신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무 말도 없이 반 학생 모두와 선생님이 절 쳐다 보았습니다. 그때 그 어색함이란~!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 중엔 청문회를 기억하는 분도 많으시고, 보지 못하신 분도 많으시겠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그 때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져 버렸습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가 유명하면 그만큼 가족에게도 번거로움이 많은 게 사실인데, 그런걸 사소한 문제라고 넘기기엔 단련이 잘 되질 않습니다.

아버지가 유명해지고 난 후, 그 부작용을 느꼈던 일 중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88년 12월 즈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울산중공업에서 노조원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게 되셨는데, 그 연설내용이 ‘나 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 국회도 흔들 수 있다’ 와 ‘나는 대한민국 어디에서 출마해도 당선된다’ 라고 신문에 나버린 것입니다. 이 신문기사가 문제가 되자 아버지와 보좌관 몇 분이서 과연 그런 발언이 있었는가를 당시 녹음 테이프를 몇 번씩 들으면서 확인하는 걸 옆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실제 그 연설내용은 “노동자 대표 20명만 국회에 보내 주면 화끈하게 한번 하겠는데” , “(여기 울산 동구에서) 노동자 대표 한 번 뽑아주이소. 저는 딴 데 어디 가면 또 안되겠습니까?" 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발언의 내용이 어떠했고, 왜 그렇게 악의적으로 신문기사가 났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문제는 우리집에 욕설전화가 엄청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시기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16살이었고, 한참 예민할 때다 보니 그런 전화를 견디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를 욕하는 익명의 전화는 결코 인내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짜고짜 욕설을 해대다가 뚝 끊어 버리는 사람들이 주로 였는데, 처음엔 얼마나 분하던지 한참을 울곤 했습니다. 보다 심한 사람들은 점잖은 목소리로 아버지 바꾸라고 하고는, 안 계시다고 그러면 점잖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우리 가족 모두 전화 받는 걸 기피하게 되었고, 그런 기피증은 지금도 여전해서, 전화가 오면 서로 안 받으려고 한참 눈치를 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일 몇 번이 더 겹치자 신문과 방송에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최근에 와선 모두들 면역이 되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그 때 그 일은 정말 환상적인 기억이었습니다.



호랑이 잡으러 가지 않은 아버지



아버지가 청문회 스타가 된 후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의원직 사퇴 문제, 명패 투척 문제 등등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었고, 그 때마다 전 학교에서 주변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제가 아버지 소식의 대부분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접할 뿐이지 아버지께 직접 듣지는 못했다는 걸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바깥 일에 대해선 거의 말씀이 없으시고, 우리 가족은 항상 남들보다 늦게 아버지 소식을 듣는 편입니다.

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라며 3당 합당을 강행하셨을 때, 아버지는 극렬하게 반발하셨고, 결국 몇 안 되는 분들과 잔류를 선택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MBC에서 방영한 ‘3김시대’라는 프로에서 당시 아버지가 3당 합당에 항의 하시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떠한 토론도 없이, 어떠한 합의도 없이… …’라고 크게 소리치시면서 반발하시는데, 뒷 부분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고, 몇몇 사람들에게 번쩍 들려서 뒤로 밀려나시더군요.

사실 3당합당 때의 일은 이전의 많은 사건과 달리 어머니와 별다른 의견충돌이 없었던 일로 기억이 나곤 합니다. 사실 이전의 여러 가지 일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의견충돌을 빚으시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3당합당의 경우 만큼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별 말씀 없이 조용히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거기 따라가라고 할 수 있겠노……”.

3당 합당 이후 제가 대학에 진학하던 때인 92년 14대 총선에선 아버지가 낙선하셨고, 이어서 부산시장 선거도, 15대 종로 선거도 연거푸 떨어지시게 되었습니다. 이 후 98년도 종로 보선에서 당선되실 때까지 약 7년간 아버지는 야인 생활을 하셨습니다. 사실 요즘 16대 부산 강서에 출마하신 사실을 놓고, 정치적인 노림수 정도로만 폄하하시는 분을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정치적인 의도 없이 부산에서 출마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7년간 의회로 진출하지 못했던 사람이 과연 노림수만으로 사지에 뛰어들 수 있을 거라고 정말 생각하는 건지 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제가 군대를 간 것은 93년도 3월이었습니다. 저로선 군대를 간다는 것이 무섭긴 했지만, 가지 않을 수 있는 곳이라던가, 내 뜻대로 편한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던가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해보았습니다. 국가가 절 잘 봐줘서 그런지 신체검사도 에누리없는 1등급이 나왔습니다. 대학 공부도 하기가 싫었고 이것저것 마음이 복잡한 일도 많아 1학년 때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입영원을 제출하게 되었고, 술 마시면서 기다리다 보니 3월에 영장이 나와서, 전 춘천 102보충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신병교육대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침상대기를 하면서, 소대장들이 모두들 절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유명한 사람이고, 그렇다고 특별히 부탁 받은 것은 없고, 사고라도 나면 골치가 아프다는 생각에 모두들 절 기피했던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화기소대장이 절 맡게 되었고, 전 이기자부대 독수리연대 3대대 사자중대 화기소대에서 60M 박격포 포판을 메고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당시 중사였던 화기소대장님도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었고, 중대장님도 임기가 얼마남지 않았었고, 대대장님도 얼마 있지 않다가 다른 곳으로 가셨고, 연대장님도 곧 다른 분이 오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배치를 받았는지 그때서야 훤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서 거기에 갔던 간에 저로선 추억에 겨운 시간들입니다. 유독 행군이 많기로 소문난 부대가 되어 항상 걸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낮에도 걷고, 밤에도 걷고, 새벽에도 걷고, 비 맞으면서 걷고, 눈 맞으면서 걷고…… 화악산, 만산령, 수필령, 대성산 등등을 돌아다니다 보니 요즘에도 전 절대 등산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 나간 훈련에서부터 비를 맞으며 잠도 자봤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깨우니까 짜증이 날 정도로 곤히 잤던 기억도 납니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군대 이야기는 대하장편으로 뽑아 낼 수 있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뛰어난 점이 없어 군 생활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욕도 많이 먹고 나름대로 인정도 받으면서 어쨌든 남들처럼 무사히 제대의 그날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함께 생활했던 소대원들 생각이 많이 나는데, 모두 저에게 잘해줬던 것 같습니다. 특히 고참들의 경우 제가 얼마 있지 않아 편한 곳으로 옮길 것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다소 냉정하게 대하다가, 계속 생활하면서 점점 잘해주셨습니다.

과연 저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저희 소대에선 구타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군대의 구타근절대책은 좀 유명한 사람 아들이 소대에 한명씩 골고루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 있을 동안 아버지는 면회를 따~악 한번 오셨습니다. 신교대 퇴소식 날이 그 날이었습니다. 그 이후 아버지가 면회를 오신다든가 편지를 보내신 적은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면회를 자주 오신다든가, 편지를 자주 보내셨다면 부대에서도 많이 부담스러워 했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제가 군대 가기 전 아버지께서 들려 주셨던 말씀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지금까지도 제 좌우명으로 쓰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전엔 양면이 있다. 지금 군대를 가는 것이 시간 낭비 같기도 하고, 억울한 부역을 떠맡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세상 모든 일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은, 일찍 해치우고, 즐겨야 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아버지



제가 군대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고배를 들이켜야 했습니다. 선거에 연거푸 실패하시면서 나름대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해 자리를 잡아보려고도 하셨었는데, 변호사 생활에서 손을 놓으신 지 10년 가까이 흘러 그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 한 것은 95년도 5월이었는데 96년도엔 꼬마민주당의 깃발을 들고서 다시 16대 총선에 출마하셨다가 종로에서 낙선하셨습니다.

97년쯤엔 종로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아버지께선 종로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정치를 오래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국회의원 생활을 오래 하신 것은 아니셨고, 부산이나 서울 어디에도 관리해 놓은 지역구 같은 것은 없으셔서, 종로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98년도에 종로의 보궐선거에서 아버지는 다시 원내에 진출 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의 의원생활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는 모두의, 정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산에서 출마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족도 반대하고, 보좌관도 반대하고, 친지도 반대하고,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반대하고, 당에서도 반대하는데 아버지는 부산으로 가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요즘도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히 제가 짐작하기엔 97년 대선의 구도가 아버지를 부산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선 이해할 수 없는 정치사건중의 하나가 ‘3당합당’이었는데, 2002년 대선에선 3당합당의 수혜자들이 정권을 놓고 경쟁할 것이라 예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선 3당합당에 따라가지 않은 사람보다 3당합당에 따라간 사람들이 더 잘 된다면, 앞으로의 정치나 역사에서도 3당합당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 여기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직접 부산에서 당선된다면, 최소한 3당합당 수혜자 대 3당합당 거부자의 구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아깝게도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강서구에서 낙선 하신 후,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중국집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저와 중학교 1학년 때 짝을 하면서 친해진 경상도 토박이인데, 아버지가 3당합당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안 따라가셨으면서 왜 김대중 대통령 밑에 가 계시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하는 바람에 아연 실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껏 ‘사람을 고문하던 정권’의 사람들 밑에 갈 수는 없다라는 신념을 지키신 것인데, 요즘에 와선 그런 신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전 주변사람들을 만나면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많고, 또 주변 사람들 중에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 세간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접하곤 합니다. 정치인 욕하는 건 정말 수시로 들었고, 때로는 아버지 욕을 들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제가 느끼기엔 사람들이 ‘3당합당’에 대해 그리 부정적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지역감정이 망국병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오히려 지역감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서야 ‘3당합당’이 청천벽력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변절에다 지역감정 조장이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엔 그저 멋진 덩크슛 정도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저 그런 스포츠 경기처럼 정치를 보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아들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분위기로는 꼭 이길 것만 같았던 부산 강서에서의 선거도 패배하시고 아버지는 다시 원외가 되셨습니다. 이전의 낙선과는 달리 아버지도 많이 낙심하셨고, 어머니나 동생, 저의 충격도 큰 편이었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부산에서 선거 마무리를 하는 동안 저는 먼저 서울로 올라왔고, 거기서 아버지의 홈페이지에 엄청나게 올라오는 글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땐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 졌고, 저도 모르게 게시판에 몇자 쓴 것이 다소 반향을 얻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가 낙선하신 후 쏟아진 글들로 인해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어 ‘노사모’가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노사모’에 대해선 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정말 많으실 것입니다. 지금껏 정치를 하시면서 그렇게 고마워하고, 애착을 가지시는 대상은 ‘노사모’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무슨 행사나 일이 있을 때 마다 ‘노사모’의 활동의 활발한데, 그 때마다 아버지는 집에 와서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라고 되뇌이곤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일을 돕지 않는 저로선 가슴이 많이 찔립니다. 그래도 ‘조용히 있는 게 돕는거다~’하고 씩 웃어 넘기곤 하지만……뭐라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

아버지가 2000년 8월에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취임하시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론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음으로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어머니는 아버지가 관직에 있으셨으면 하고 바라셨던 분이라 판사에서 변호사로 전업을 하실 때에도 많이 반대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로선 바라지 않는 관직은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대통령직입니다. 아버지께선 어머니가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아시면서도 많이 서운해 하시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장관으로 재직하시고 계실 때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장관업무에 정말 재미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거의 아버지 얼굴을 뵐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 하신 것 같습니다. 가끔 신문지상에 아버지가 정치적인 일에 관심이 많고 장관업무에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하면, 아버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곤 하셨습니다. 퇴임하신 이후에도 종종 제게 장관시절에 정말 열심히 했다는 것을 자부하시는 걸 보면 -그런 일은 거의 없으신 분인데도- 아버지가 그런 신문기사에서 느꼈을 억울함이 이해가 되곤 합니다.

장관을 그만 두시고 나선 요즘에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들 외엔 그다지 큰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정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경선통과를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원래 집에서 정치에 대해 말씀을 잘 안 하시는 편이시고, 또 간혹 몇 마디 하시더라도 집 안에서의 말과 밖에서의 말이 다르지 않으신 편이라 특별히 저만 알고 있다던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2002년 1월입니다. 며칠 전 신문지상에 민주당의 경선방식이 확정되어 본격적인 경선체제에 돌입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버지가 경선을 통과하실 수 있을는지, 또 경선을 통과한다면 대선에서 승리하실 수 있을는지는 저로선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저 아버지 하시는 일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뿐이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또 뭘 하셔야 하나 걱정하는 마음 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주제 넘은 짓’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혹시 아버지가 어떤 정치적인 이유를 내세워 저더러 이러한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사람들이 오해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정치인 누구누구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로써 아버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형편없는 글 솜씨에 별볼일 없는 기억력으로 이것 저것 내용을 풀어내다 보니 담고싶은 내용을 그다지 써보지도 못한 채 글을 맺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글의 내용 중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거나, 주제 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저를 탓하시는 것으로 충분 하리라 생각됩니다. 또 그런 점에 대해선 이 자리에서 미리 정중하게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2002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