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펌] 스타벅스... 세계의 커피계를 평정하다

   이런 스타벅스가 성장율 50% 감소(20 -> 10%),  순이익 반토막으로 위기 상태랍니다... 
   오히려 브자질 콜롬비아등 그동안 '을'로서 목소리를 낮춰야 했던 원생산자들이 스타벅스 주식을 매수 중입니다. 
   이제 커피전쟁은 제 2Round로 진입하는듯. 


스타벅스... 세계의 커피계를 평정하다


   소설 ‘모비딕’에서 따온 이름, 스타벅스   
  스타벅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맛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타벅스의 생명은 바로 이 맛에 대한 고집에서 출발한다.미국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아무래도 고급문화보다는 대중문화, 대량소비의 땅이다. 고급 원두커피보다는 맥스웰의 나라인 것이다. 커피 맛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원두의 질이지만 원두를 어떻게 배전(焙煎)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맥스웰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강배전이 정착하지 못했으며 약배전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포장식품 회사들은 많이 볶을수록 무게가 줄기 때문에 약배전을 선호한다. 또한 고열에서 볶는 과정을 견뎌내려면 ‘아라비카(arabica)’ 같은 고품질의 원두가 있어야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 값싼 ‘로부스타(robusta)’ 종을 취급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약하게 볶은 커피 맛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커피의 참 맛은 강배전에 있다. 원두커피는 강하게 볶을 때 참다운 맛과 향기가 우러나온다. 잘 볶은 커피를 다크로스트 커피라고 하는데 스타벅스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 미국인 중에서도 소수만이 이 맛을 알고 있었다.

시애틀에 정착한 조그마한 소매업체 스타벅스 커피는 바로 이 강하게 볶은 커피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고속성장이나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었다. 이 회사를 창업한 제리 볼드윈과 제브 시글은 각각 영어 및 역사교사였으며 또 한 사람 고든 보커는 작가였다. 이들은 모두 커피 마니아인데 제대로 된 맛의 커피를 찾아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아예 가게를 창업하기로 했다. 돈 버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이들은 ‘보잉버스트’라 불리는 시애틀 사상 최악의 불황기에 가게를 열었다. 시장의 동향이 아니라 오로지 좋은 커피를 먹고 싶어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스타벅스란 이름 역시 교사와 작가 출신인 이들 동업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타벅스는 바로 허만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이름이다.

스타벅스의 세 창업자가 모든 것의 원조는 아니다. 원조 뒤에는 또 다른 ‘진짜 원조’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스타벅스의 정신적 지주인 네덜란드인 알프레드 피트다. 그는 암스테르담 커피상의 아들로 인도네시아, 동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커피에 대해 남다른 미각을 가지게 되었다. 십대에 그는 암스테르담의 큰 커피수입상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자라서 그는 커피무역상이 되었으며 커피 맛으로 원산지와 품질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그때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1950년대부터 고급종인 아라비카 커피 원두를 수입했으며 1966년에 ‘피츠 커피 앤 티’라는 상점을 개업하고 운영했다. 그는 커피 원두를 팔면서 커피를 마치 와인처럼 다루었다. 스타벅스가 원두를 사오는 곳이 바로 알프레드 피트의 상점이었다.

스타벅스의 창업자들이 피쿼드의 일등항해사 이름을 사명(社名)으로 한 것도 대양을 향해하던 무역선, 커피를 운반하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고 결국은 근대세계를 창출한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었을까. 모비딕에서 스타벅스는 흰고래를 광적으로 좇는 에이허브 선장의 열정에 대해 사사건건 이성적으로 제동을 거는 인물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에이허브가 밧줄에 엉켜서 흰고래와 한몸이 되어 바다로 빨려 들어가자 그때까지 가장 이성적이던 스타벅스가 돌연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선원들에게 흰고래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주인공 이슈메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선원이 바다에서 몰사한다.



  ‘순수한’ 커피 맛을 찾아서   

  해마플라스트의 영업담당 부사장으로 재직중이던 하워드는 1981년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시애틀에 있는 조그마한 소매업체가 이례적으로 한 종류의 드립식 커피 추출기를 대량으로 주문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기 퍼콜레이터나 드립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고 있는데 이 회사는 왜 구식 제품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애틀을 방문했으며 이것이 결국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그는 스타벅스 커피 맛을 한번 보고는 이것은 커다란 사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별 생각 없이미국식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강배전한 아라비카 커피 맛을 보고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다면 전체 미국인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스타벅스의 비전을 보았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힌다. 하워드 슐츠의 엄청난 야심에 겁을 집어먹은 스타벅스 경영자들이 그를 거부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스타벅스의 창업자들은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커피를 좋아해서 회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기업 부사장 출신의 인물을 영입해서 회사가 새로운 바람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워드가 스타벅스의 창업자 제리 볼드윈을 설득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하워드의 열정에 감복한 제리는 1982년 마침내 그의 입사를 허락한다. 7만5000달러의 연봉과 다국적기업의 부사장이라는 권위, 회사가 제공하는 승용차와 비서를 버리고, 자신의 주거지에서 3000마일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소매업체에 합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하워드 슐츠의 아메리칸 드림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미 잘 정비되어 있는 대기업 조직의 조그마한 나사가 되기보다는 자기 꿈을 실현하는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커피상의 고집, 문학과 역사 교사 및 작가가 모인 조그마한 가게는 커피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는 적합할지 모르나, 자기들이 갖고 있는 맛을 전세계에 개방하고 이를 퍼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한 신념과 추진력이 필요했다.

바로 그 자리에 뉴욕 빈민가 출신의 하워드가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타벅스는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회사였지 커피숍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손님들은 커피를 사가지고 가서 집에서 끓여 먹었다. 커피 바를 개장하자는 아이디어를 추진한 것은 물론 하워드이다.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에스프레소 바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 이상의 곳이다.

그곳은 앞뜰의 연장이자 가족개념의 연장으로서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서 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은 단지 커피를 마시고 갈 뿐인 미국의 커피숍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성공한 이탈리아식 커피 바 또한 에스프레소 바에는 무뚝뚝한 웨이터가 아니라 배리스타라고 하는 전문적인 점원들이 있다. 이들은 물건을 파는 종업원이 아니라 자신이 파는 커피의 맛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며 또한 손님들과 인생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낭만주의자들이다. 배리스타는 그곳 이웃들로부터 존경받는 예술가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커피를 고객에게 전달할 적당한 형식을 찾고 있던 하워드는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는 미국의 거리에 에스프레소 바 스타일의 커피 바를 개장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은 스타벅스 창업자들의 비전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타벅스는 소매점이지 레스토랑이나 바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더욱 문제는 스타벅스가 그때까지 흑자를 내는 튼튼한 회사였다는 점이다. 자체 강점을 지니고 잘 운영되고 있는 회사를 왜 낯선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는가.

이러한 반감을 기존 경영자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워드가 스타벅스에 입사하기 위해 제리를 설득하는 데 1년이 걸렸듯이 커피 바의 개장을 설득하는 데도 1년이 걸렸다. 결국 1984년 4월 시애틀 시내에 여섯번째 스타벅스 스토어를 열면서 그 한쪽 구석에 에스프레소 바를 시험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즐겨 가는 스타벅스의 탄생 순간이다.

첫번째 실험은 대단한 성공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배리스타들이 아무리 바쁘게 일해도 고객이 넘쳐 가게 밖으로 긴 줄이 생겨났다. 하지만 에스프레소 바의 성공은 스타벅스 창업자와 하워드간의 노선 차이를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갔다. 새 사업이 성공할수록 창업자 제리는 회사의 방향성이 흔들리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타벅스 측의 상당 지분을 보유한 새로운 법인이 하워드의 주도로 탄생해 본격적인 에스프레소 바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는 사업의 기본개념이 이탈리아에서 온 것을 강조하여 ‘일 지오날레’라고 자신의 회사 이름을 지었다. 자기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컨트롤하겠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 하워드는 드디어 자기만의 회사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투자였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회사의 창업자들조차 설득시키지 못한 사업을, 아직 강배전이나 아라비카보다는 맥스웰 커피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면서 하워드는 계속 거절당했다.

단순히 거절만이 아니라 실현가능성 없는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몽상가 취급을 받으면서 굴욕감을 느꼈다.

그는 빈민가 출신으로 모멸을 당한 청소년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워드는 억척같이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한 끝에 30명의 투자자로부터 165만달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별한 네트워크를 동원하지도 않았고 편법을 쓴 것도 없었다. 오로지 그의 아이디어, 강배전한 아라비카 커피를

에스프레소 타입의 바에서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에 사람들이 공감한 결과였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늘 오페라를 틀었으나 미국의 고객들은

곧 불평을 늘어놓았다. 일 지오날레는 곧 음악을 다양화했으며 나비 넥타이 정장을 하고 있던 배리스타들의 복장도 자율화했다.

이탈리아의 요소를 들여온다고 해서 모든 것을 경직되게 운용할 필요는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커피를 와인처럼 다루다    

  이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1987년 스타벅스 창업자들은 커피 원료 사업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소매점 사업과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하워드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의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어렵게 스타벅스를 인수했다. 1983년 스타벅스를 떠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이제 스타벅스의 CEO가 된 것이다.

인수 이후 회사의 이름을 두고 잠시 논란이 일었다. 스타벅스란 이름이 제리 등 시애틀의 창업자들이 문학적 취향을가미하여 만든 것임은 이미 말한 대로다. 하워드는 스타벅스를 떠나면서 이탈리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 지오날레라는 자기 고유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는 이 이름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 자체

강점을 지니고 있는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택하고, 자신이 만든 일 지오날레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가 일 지오날레라는 이름을 고집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스타벅스의 이야기는 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에센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에센스란 결국 최적의 향기와 맛을 담은 커피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런 이야기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워드 슐츠가 시애틀을 방문했을 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강배전한 커피 열매의 향기였다. 그리고 또한 그가 전 미국인, 더 나아가 세계인을 자신의 커피 바로 몰려들게 만든 것도 결국은 그 향기 덕분이다. 그러나 에센스만으로 스타벅스 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환경에 따라서 변신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한 것이다.

처음에 스타벅스 창업자들은 커피 바를 개장한다는 생각에 반감을 품었고 결국 그것 때문에 하워드와의 결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워드가 항상 변화의 주역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워드도 자신의 세계가 어느 정도 정착된 후에는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것은 무지방우유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나타났다.

무지방우유를 넣은 커피를 원하는 고객이 늘고 있었으나 하워드는 그러한 제품을 공급하기를 거부했다.

스타벅스의 미션은 순수한 커피를 미국에 제공하는 것이다. 하워드는 탈지우유가 묽고 맛이 강하기 때문에

스타벅스 커피의 맛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커피의 맛,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다.

    

  프랜차이즈를 거부하는 회사   

  그러나 1989년 어느날 하워드는 시애틀의 한 스타벅스 스토어에서 젊은 여자 고객이 무지방우유를 넣은 라떼를 요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배리스타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그러한 제품이 없다고 답하자 그녀는 다른 가게를 찾아갔다.

그 순간의 느낌을 하워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잃어버린 한명의 고객, 소매업자를 두고 그 이상 무슨 논쟁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즉시 무지방우유를 넣은 제품을 공급하도록 회사 정책을 바꾸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고객만족경영의 마인드다. 사실 하워드가 스타벅스의 직원으로서 일할 때 그는 이 회사의 문제점 중 하나가 고객에 대한 지나친 고자세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고객들이 잘 모르는 고급 원두커피를 다루다보니 이 회사의 종업원들은

고객에 순응하기보다는 고객을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서 친절한 서비스보다는 때로 불손한 태도가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하워드는 이러한 풍토를 제거하고 고객만족체제로의 변신을 시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이 가지지 못한 미국식 경영의 강점이다.

제품의 다양화에 대해서 스타벅스는 점차 탄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스타벅스는 1994년 펩시콜라와의 제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원두커피 회사와 청량음료 회사가 만나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그것은 캔으로 포장된 냉커피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스타벅스는 이제 커피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버린 듯하다.

그러나 커피의 맛과 향기야말로 이 회사의 본질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산이다. 결국 제품은 다양해질지라도 제품 하나 하나의 품질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스타벅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간다. 하워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이키가 모든 생산공장을 다 직접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또는 펩시콜라 한잔을 먹으려 해도 펩시콜라 가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스타벅스는 생산과정과 판매과정 그 어느 것도 아웃소싱할 수 없는 회사다. 생두를 볶는 배전기에서부터 소비자의 입까지 전과정을 다 관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워드는 자신의 집무실 창문에서 배전기의 작동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또한 스타벅스는 결코 프랜차이즈를 허용하지 않으며 전부 회사에서 직영하는 스토어들이다. 하워드는 “프랜차이즈란 우리와 고객 사이를 가로막는 중간상인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원두에서 마지막 에스프레소 바의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에 대한 장인다운 집착과 노력이 스타벅스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커피를 와인처럼 다루는 회사의 태도야말로 스타벅스의 불변하는 정체성인 것이다.


  
     
  ‘네 마음을 다 쏟아 부어라’   

  비정규직에까지 의료보험을 제공한다는 스타벅스의 사원복지 정책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하워드는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우선 종업원들의 신뢰를 얻으라는 명확한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가 실패한 아버지로부터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만약 사회와 기업이 좀더 합리적이고 정상적이었다면 아버지는 패배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약간의 후원과 약간의 기회가 박탈됨으로써 한 인간의 생애가 실패로 귀결된다. 하워드는 이러한 신념 아래 종업원들에게 일과성의 계약이 아닌 신뢰로 맺어진 더욱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하워드가 직접 저술한 스타벅스 성공에 관한 저서는 그 제목이 ‘네 마음을 다 쏟아 부어라(Pour your heart into it)’이다. 이것은 그의 인생 좌우명이기도 하고 자신의 부하직원들에게 던지는 요구이기도 하다. 특히 스타벅스의 최전선인 에스프레소 바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배리스타들은 단순한 점원이 아니다. 이들은 커피와 인간을 사랑하고 자기의 일에 긍지를 느껴야 한다.

이들이 일과 고객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직은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워드가 부하를 관리하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스타벅스는 1994년 심각한 냉해로 인한 커피 가격 급등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커피 가격은 3개월 만에 4배 이상 올랐다. 가격이 이 상황에 이르렀을 때 회사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판단하고 지금 대량 구매를 할 것인가, 아니면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판단하고 구매를 보류할 것인가.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결정이었다. 금융전문가 오린은 시장의 상황을 예측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최악의 경우를 피하자고 제안했다. 즉 현재 가격으로 구매를 하면 어렵겠지만 회사는 운영할 수 있다. 그러나 가격이 더 오른다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린의 권고에 따라 회사는 커피를 대량 구매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커피 가격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벅스는 가격이 정점에 달했을 때 엄청난 양의 원료 구매를 단행한 꼴이 됐다. 그 시기 이후 고가의 재고로 인한 부담이 회사를 괴롭혔으며 이 부담에서 벗어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러나 하워드는 결코 오린을 탓하지 않았으며 이후 회사의 합리화계획 추진 책임자로서 그를 계속 중용했다. 오린은 최악을 피하고자 한 것이며 그의 제안에는 논리적 하자가 없었다. 과연 스타벅스는 그 시기를 견뎌냈으며 전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만약 가격이 더 올랐다면 회사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워드는 오히려 고가의 원자재 부담 아래서

경영을 함으로써 낭비요인을 제거하고 회사의 조직과 업무 프로세스를 재정비하는 기회를 얻었다고 오린을 두둔하였다.


    ‘작은 것’을 지향하는 초거대기업   

  스타벅스는 이제 전세계를 무대로 한 기업이 되었다. 하워드가 시애틀에 가게 네개를 가진 조그마한 소매업체를 방문했을 때

머릿속에 떠올린 비전이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시애틀의 작은 업체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는 늘 이렇게 자문한다. “어떻게 성장하면서도 계속 작은 것을 지향할 수 있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 처음 문을 연 시애틀의 에스프레소 바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료이자 친구다. 지금은 한달에 배리스타만 500명을 새로 채용한다. 이 500명을 어떻게, 가게 한쪽 구석을 빌려 운영하던 에스프레소 바의 배리스타와 같이 만들 수 있을까. 그는 늘 이것을 고민한다.

주식매입권을 부여하고 업계에서 가장 높은 임금과 복지제도를 제공하는 것은 기본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스타벅스라는 회사에 대해 종업원들이 느끼는 자부심이다. 세계 최고의 커피회사라는 자부심이 긍지와 열정을 이끌어낸다. 스타벅스는 설문조사를 통해 직원들의 사기와 회사에 대한 만족도를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워드는 조사결과를 통해 배리스타들이 스타벅스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하워드는 자기 인생에서 모험을 걸 만한 대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과감하게 배팅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가 꿈꾼 것을 이루었다. 아메리칸 드림과, 아라비카의 향 짙은 커피와, 낭만이 넘치는 에스프레소 바의 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를 정복할 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스는 에이허브가 못다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함께 수장당했지만 하워드 슐츠가 이끄는 스타벅스는 창업자들의 꿈을 보존하고 아직 순항하고 있다. 대양을 누비던 과거의 무역상들처럼 스타벅스는

세계를 항해하며 사람들에게 꿈과 낭만과 안식을 제공한다. 전통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변신해 가는 그들의 성장엔진이 이번에는 또 어디를 향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우리나라의 스타벅스 히스토리~~~~~
 
한국 커피의 역사는 스타벅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9년 7월 스타벅스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연 이후 7년 반이 지난 2007년 4월5일 국내 200호점인 이태원입구점이 오픈했다. 200여 개 점포만으로 스타벅스는 서울 도심의 상권을 바꿔놓고 거리의 표정, 심지어 대중의 기호까지 변화시켰다. ‘스타벅스 연방’ 에서 매장 기준으로 한국은 미국(9400개), 캐나다(725), 일본(665), 영국(522), 중국(213)에 뒤이어 세계 6대 ‘강국’으로 꼽힌다. 한국시장을 바라보는 미국 본사의 기대도 남다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역시 200호점 오픈행사 자리에서 “2009년 국내 300호점을 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발언해 공격적인 점포 확장을 예고했다.

스타벅스의 성공 신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별화된 맛과 향, 독특한 브랜드 전략과 함께 미국이라는 강력한 문화적 배경까지 거론된다. 그런데 과연 이것만으로 한국에서의 성공을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많은 미국계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실패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스타벅스 점포개발팀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리테일(소매) 산업, 특히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점포개발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이들은 지역별로 매장의 가능성과 규모를 검토하고, 해당 건물주와 조건을 협의해 계약하는 단계를 거쳐 매장 인테리어까지 결정한다. 즉, 커피의 맛과 향을 제외하고 영업 직전까지 매장의 밑그림을 전반적으로 설계한다.

백영호(42) 스타벅스코리아 개발팀장은 스타벅스 신화의 산증인이다. 1999년 스타벅스 1호점 개척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 생긴 203번째 현대미아점까지 모든 스타벅스 매장이 그의 손을 거쳤다. 99년 단 두 명으로 시작한 점포개발팀은 현재 14명으로 늘어났다.

“상가에서 목(위치)이 중요하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얘깁니다. 하지만 스타벅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스타벅스 특유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너무 젊지도 나이 들지도 않은 개성 강한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입지를 새로 만들어내자는 전략이었지요.”

스타벅스 점포개발팀이 주목한 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타벅스의 성공 방정식을 복기해보자.

1_ 첫수가 판 전체를 결정짓는다

“스타벅스 1호에서 10호점까지 1년 반 동안의 선택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습니다.”

스타벅스는 광고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매장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라는 철학 때문인데, 이는 진입 초기 문을 연 매장의 성공 여부가 관건이다. 때문에 97년 스타벅스 도입을 결정한 신세계는 입지 선정에 거듭 신중을 기했다. 1호점을 내는 데 무려 2년을 준비했고, 이후 10호점을 내기까지 1년 반의 시간이 걸렸다.

첫 매장인 이대점에 승부를 걸었다. 젊은 여성 소비자들이 대다수인 만큼 새 브랜드에 거부감이 적고 입소문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결과는 대성공. 당시 어학연수를 다녀온 여대생들은 미국에서 경험한 커피를 한국에서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매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다음 행보는 최고급 상권인 강남과 명동에 대한 집중공략 단계. 국내 4호인 명동점은 4층 빌딩 전체가 스타벅스 매장으로 채워진 세계 최대 커피전문 매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명동매장이 던진 충격파는 대단했다. 모든 언론이 자발적으로 스타벅스를 홍보해준 것은 물론, 명소로 탈바꿈한 그 빌딩은 공시지가 1위 지역이 되었다.

스타벅스는 이어 대학가와 여의도 등 여론 주도지역을 공략하며 초기 진입전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스타벅스 장성규 대표가 200호점인 서울 이태원 입구점에서 무료 커피를 나눠주고 있다. 
 


2_ 블루오션을 개척하라!

“빌딩 로비에 커피전문점을 들인다는 것은 당시만 해도 파격이었죠.”

2002년 이후 서울 시내 주요 오피스 빌딩에 공통점이 생겼다. 1층 로비에 커피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스타벅스가 들어서면 건물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유동인구가 늘면서 인근 상권을 발달시키고 자연스레 빌딩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

 스타벅스는 강남과 여의도의 유휴 사무실과 1층 로비를 커피 매장으로 바꿔간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30호점 이전까지는 괜찮은 빌딩의 로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빌딩주는 커피를 팔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점포개발팀은 해외 사례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건물주 설득작업을 폈다.

‘저녁 6시 이후 불 꺼진 오피스는 빌딩 가치를 떨어뜨린다’ ‘커피 매장이 들어오면 인근 상권이 따라올 것’이라는 장밋빛 예측과 함께. 때로는 건물주의 자제들이 원군이 돼주기도 했다.

유학 시절 스타벅스를 접한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를 적극 설득했다. 결국 스타벅스는 권리금을 주고 기존 상가를 빌리는 전통적 진입방식이 아닌 오피스 빌딩이라는 블루오션을 통해 염가에 신규 매장을 대규모로 오픈할 수 있었다.

3_ 건물주의 과도한 요구는 회피한다“

스타벅스는 땅을 소유하지 않고, 높은 임대료를 피해갑니다.”

스타벅스가 땅을 소유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를 파는 커피 매장’이라는 당초 목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비싼 임대료가 필요한 매장이라면 누구라도 따라올 수 있는 전략이다. 상권을 따라가지 말고 스타벅스만의 방식으로 이끌어야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실패한 스타벅스 매장은 없지만, 기존 위치를 포기한 매장은 꽤 있다. 코엑스 아셈타워점이나 4층 명동점이 대표적이다. 이유는 스타벅스 등장 이후 본격화된 커피 전쟁 때문. 초기에 값싼 장소를 개척하며 시장을 선점한 스타벅스였지만 후발 업체들의 공격적 확장 전략에는 뒤로 물러서야 했다.

매출액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무리한 임대료 인상 요구를 수용해선 곤란하다. 값비싼 점포는 곧장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명분 대신 실리를 챙기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4_ 고객의 감수성을 이끌어라

“유동인구가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 접근이 관건입니다.”

유동인구에 구애받지 않고도 매장을 성공시킬 수 있다니 일종의 패러독스(역설)로 들린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이 많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지향하는 목표가 같고 필요로 하는 사람의 가까이에 자리하되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하느냐가 관건이다. 소수라도 그들이 트렌드세터라면 자연스레 고객은 그들을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때문에 매장 위치만큼이나 인테리어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언뜻 똑같아 보이는 스타벅스 매장이지만 지역에 따라 네 가지 인테리어로 구분된다. 커피와 관련된 네 가지 컨셉트, 즉 그로(Grow), 로스트(Roast), 브루(Brew), 아로마(Aroma)가 그것인데 이는 각각 커피의 재배, 배전, 추출, 향을 의미한다. 젊은 사람이 많은 장소는 붉은색 계열로 내부를 꾸민다. 오피스 밀집지역은 파란색의 ‘브루’, 문화 중심지역은 풀색의 ‘그로’ 등으로 짙은 뉴욕 감성을 표현한다.

매장 분위기는 고객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람을 통한 입소문은 어떤 광고보다 강력하고 결국 상권을 움직인다.

스타벅스가 ‘살아 있는 마케팅’ 신화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출처는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