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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Goodman Brown
루루루
2002. 9. 18. 01:25
Young Goodman Brown-Freudian Appr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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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로이드의 아주 유명한 분석 사례를 잠깐만 살펴보자. 널리알려진 '늑대인간'의 분석 사례는 한 러시아 청년이 겪었던 유아기 노이로제에 관한 것인데, 보고서는 유아기 노이로제가 진행되고있 을 당시의 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진지 15년이 지난 후의 분석결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드는 자신의 분석을 시작하기전 서두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한계를 가정한다. \"노이로제가 있는 아이라면 그 당시에 분석하는 것이 당연히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자료는 풍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말과 개념을 아이에게 너무 많이 빌려주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분석한다 하더라도 가장 깊은 단층은 의식이 파고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성숙한 어른의 기억에 의존하여 유아기의 병을 분석하면 이런 한계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때는 그것을 왜곡하고 새로 꾸민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늑대인간-유아기노이로제에 관하여. 143)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이점이다. 러시아 청년이 어렸을 때 보았을지도 모르는 원초적 성교장면은 그의 신경증적 원인이라고 그의 꿈분석을 통해 제시되었지만, 기실 그것은 상기된 바와 같이 '보았을지도 모르는' 다시 말한다면 사후에 재 구성된 기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형세는 다소 모호해진다. A가 B의 원인이라고 기껏 분석을 해 놓았는데 A가 그 원인이 아닐수도 있다니, 결과는 명백한데 원인의 행방이 묘연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드의 세 가지는 출발한다. 각 가지의 이름은 전이, 사후논리, 그리고 '존재하지 앟았던 것의 상실 혹은 그것의 폭력'이될 것이다.
2.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Young Goodman Brown 의 심부름이 무엇이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마치 꿈처럼.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을 닮은 누군가와 동행을 하며 숲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환영뒤에 불현 듯 Young Goodman Brown 이 깨닫는 것은 차고 축축한 바위의 까칠함뿐, 그때까지 그가 보았던 환상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있고난 후의 Young Goodman Brown의 변화이다. 그는 예전과 다르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심지어 자신의 아내 Faith까지, 의심스럽게 대하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한채 쓸쓸히 죽어간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1690년대 Salem Village에서 자행된 비인륜의 전형이라고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실상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들이 저지른 '폭력'은 바로 마녀가 존재해야만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인데, 역사와 과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한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다시말해 존재하지 않는 '마녀' 에 대한 망상이 실제 살아 숨쉬며 투쟁하는 개개의 현실체들에게 현실의 그 어떤 권위와 억압보다 도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역사는 현재까지 이런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의 몸싸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3.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상은 어떻게 가능해 지는가? 어느 사회고 그것이 서로 상이한 욕망의 대상을 지닌,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닌 개개 구성원의 집합을 전제로 할 때는 불가불 규제와 통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규제와 통제의 시초는 대부분의 신화에서(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보여지듯, '금기'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금기의 위반과 그에따른 부수적 정신형성물로써의 죄책감의 관계는 '토템과 타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최초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이것은 물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는 심리적 현상을 별 의심없이 사용하고 있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누군가가 있다면 본인의 이론은 그에 대해 또 다른 답변을 달갑게 준비해야 하리라.)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결과로써 실제적인 아버지에 대한 권위의 전복이 이루어 졌다고 가정해 보자. '아버지 살해'의 근원적인 원인으로서의 양가성이 '아버지 살해'가 행해지고 난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일체화의 열망에서 시작된 애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책'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아버지 살해'에가담한 모든 형제들에겐 이젠 집단 모두가 느끼는 '자책'에 해당하 는 '죄책감'의 의식이 형성된다. 이러한 '죄의식'의 형성은 아버지의 권위를 전복한 형제들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하여금 가해졌던 것과 똑같은, 혹은 더 가혹한 금지를 요구하게 된다. 바로 자신을 폭도로 이끌었던 그 체제의 유물을 자신이 더욱더 확고하게 유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인류 모두가 경험적으로 한 두 번쯤 겪어보았을 '자의식 혹은 죄책감'의 근원은 밝혀진다. 그것은 계통발생적으로 유전되면서 시대와 역사가 필요로 했던 교육, 문화, 도덕 속에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 권위'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Young Goodman Brown의 경우 그러한 환상은 그 당시의 형식적인(분명히 그 당시의 청교도적 윤리관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닌 있어야할 인간의 모습을 기준으로 재단되었을 것이다.) 청교도적 윤리관에서 기인한 억압의 결과물이다.
4. \"좁은문\"의 가련한 여주인공 알릿사는 괴로워 한다. \"주여, 제 마음의 덕이 부정하는 이 덕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지 그녀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했던 실체는 청교도가 아닌 Protestant 윤리였을 뿐이다. 실제 인간은 정신적인 활동의 영위만으로 그 존재가치를 충분히 획득할 수는 없다. 영혼의 문제가 명백히 존재하듯 그 이면에는 똑같이 육체의 문제가 존재하므로.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가장 큰 명제는 그것 아닐까?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투쟁 혹은 지연된 타협' 신체의 변화에 따른 그 만큼의 정신적인 교육과 배려가 수반되지 않았을 때, 종종 인간은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성에 무지한 순진한 청년이 어느 맑은 5월, 몽정을 겪고났을 때 그는 과연 자신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인가? 보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눈길이 먼저가는 사진속 여인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청년은 과연 죄책감의 그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을까? 죄책감의 멍에를 벗어난 자위행위는 과연 그가 몇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인가?(본인이 남성이기에 남성의 예를 들었다. 매우 첨예한 사항이라 고려되기에 사족같은 단서를 붙인다.) 청년은 자신의 행동이 투명화되어 자신의 가족이나 치눅들에게 알려졌을 때, 실제로 그에게 돌아올 그 만큼의 반응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엄중한 자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것이다. 교육. 그리고 수준에맞는(?) 문화의 단편이 거칠게 엮어놓은 보이지 않는 덫이다.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그 매개의 변항속에서 이념, 체제, 종교, 인종등 실로 수 많은 유령들이 자리를 차지해 왔었음이 우리 인류 현대사의 무게이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수는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을 수는 없다\" 고. 인간의 것이되 인간적인 것을 거역하는 반란의 테러리스트.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욱 무섭다. 실체가 없기에 대응할수 없으므로.
5.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진리는 그러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에겐 조금 다르다. \"유추가 가능하면, 그것이 재구성될수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동등하다.\" 숲 속의 사건들. 그것은 어떻게 객관화된 실제처럼 Young Goodman Brown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할수 있었는가? 만일 그가 본 환상이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절대 허용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면, 그저 믿지 않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Young Goodman Brown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 종교의 믿음을 뿌리까지 뒤흔들던 무엇이 있었다. 개연성이라는 것. 그가 숲속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그는 자신속에서 힘겹게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타인에게 숨겨진 자신 속의 모습을 인간이 직시할때의 그 당혹감이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희랍시대 부터 인간의 의식속에서 공공연한 심리현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희극이건 비극이건, 바로 자신 속의 숨겨진, 혹은 액면 그대로의 또 다른 자신과의 동일시 또는 변별성에서 극의 기능이 시작되는 것 아니던가? 프랑스의 폴 디엘은 '메두사' 신화를 분석하면서 메두사의 상징적 의미를 \"자아가 제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순간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게 될 때에 허영에 찬 영혼을 포착하는 자아에 관련되는 절망\"(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122-23)으로 해석하고있다. 그리하여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할 때 형벌로써 따라오는 마비(신화속에서 사람들은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돌로 변한다.)는 자신 에 대한 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햄릿의 부왕이 극중극을 관람할 때의 반응을 상기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Young Goodman Brown은 숲속에 서 부정할수 없는 자신의 개연성을 깨닫는다. '자신 역시도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환상 속의 무리들속에 나도 포함될수 있다는 것' 시간이 가르쳐 주는 가장 평범한 일상의 진리 앞에서 Young Goodman Brown은 자신의 여생과 맞바꿀 만큼의 두려움을 보았던 것이다.
'화해'란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내가 공유하고인정할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역지사지'란 기본적으로 그도 나 같을 수 있고, 나 역시 그와 같을 수 있다는 화해의 논리이지만 Young Goodman Brown에는 자기 파멸의 개연성으로 타나났다. 자신이 형성하지 않은, 순전히 계통발생적 으로 세습되어온 역사, 문화, 도덕적 기준이 그와 마찬가지로 붕괴되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 였던 것이다. 나의 가치 기준이 타인에게 그대로 전도되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말과 행동 이 내 안의 기준으로 재단되는 것. '도라'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면서, 프로이드는 도라의 꿈을 해석하는데 다소 과장된 성징해석과 성적개념을 요구하였다. 결과는 프로이드 자신의 가치개념과 성개념을 도라에게 적용하려 했다는 작위적인 분석이었다. 도라의 분석은 결국 실패로 남겨졌지만, 프로이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전이'의 가능성. 프로이드의 경우 '전이'는 분석과정중에 분석가와 피분석가 간에 개입된 분석외의 현상 이었지만 여기서 본인은 Young Goodman Brown이 열련의 사악한 환상들 속에서 자각한 자신안의 부정한 요소에 대한 개연성을 실제 그가 바라본 현상이 고착된 기정사실로 인정되게 하는 기제로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Young Goodman Brown은 꿈을 꾼 듯 하면서도 그 꿈의 망상적 흔적에 평생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6.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갈망하는 충동의 본원적 대상이 억압의 결과로 상실되었을 때, 끝없이 이어지는 대체물이 그 본원의 대상을 대신하지만 그런 대체물중 그 어느것도 완전한 만족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불륜을 꿈꾸는 심리. 175)
Young Goodman Brown에게 실질적으로 일어난 일은 둘중 하나이거나 둘 다이다.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러나 존재하지 않았던 신앙의 상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을거라 믿었던 자기 내부의 이단적 맹아를 확인하게 되는 것' 우리가 만일 이것을 외상에 해당된다고 말한다면 Young Goodman Brown은 그러한 외상으로부터 얻게 된 충격으로 남은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라고 말을 맺어야 할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프로이드는 도처에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자아가 개입된 사후의 논리라는 것을. 늑대인간의 예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사후논리란 본인의 이해수준에서 말해 본다면 현재의 어느 시점까지 축적된 도덕적,미적,경험적 사고가 어느순간엔가 과거의 한 현상으로 소급되어 그 때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일순간에 해소되는 우연적인 또 때로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만일 Young Goodman Brown에게 수수께끼로 남겨진채 해명되지 않은 부분 (실제 유년의 기억은 풀리자 않은 수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교육이나 유년의 경험에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해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은채 기억의 저편으로 묻히고 만다)이 있었고 그것이 숲속에서의 일을 계기로 해결되었는데 뜻밖에 현재까지 축적된 Young Goodman Brown의 모든 가치체계, 신념, 종교체계의 초석을 두흔드는 일이 되었다면, 이러한 논리는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것이든 종교에 대한 것이든 그 각각의 독단적 편견이 위험한 것은 그 자체 영역의 사회적 성질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맹목적인 절대성에 서 기인한다. 유년의 Young Goodman Brown이 어른의 성생활에 궁금증을 품고있었다고 가정을 해보자.(굳이 그것이 성생활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둠과 항상 격리되어야 했던 아이들에게 어른과 어둠의 관계는 어떠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어른들의 '성' 의 담론속에서 '아이들'의 자리는 없다. 아이에게 '성'은 일종의 성역이며, 범접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장소로 여겨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숲'의 상징적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이를 테면 '숲'이라고 상징되는 '성역' 속에서 Young Goodman Brown은 '금기시된' 그 무엇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결혼을 할 만큼의 경험적 축적이 가능해 졌을 때 그가 유년에 가졌던 해결되지 않은채 남겨진 그 '수 수께끼'는 풀린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해결, '미로'로부터의 해방은 그때까지 절대 통치자로 군 림하던 절대로써의 체제/권력/종교/믿음을 붕괴 시킨다. 물론 그 붕괴를 토대로하여 다시금 새 문명이 출발하기도 한다.(유진오닐-느릅나무 아래 욕망의 결말부분)그러나 Young Goodman Brown에게 그것은 가혹한 개체로서의 공중분해였던 것이다. 유년의 믿음은 대개 절대적이다. 특히나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음에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될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절대적 믿음에 대한 누수현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적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절대적 가치가 붕괴됨으로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은 극치를 이룬다. 어떻게해서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붕괴를 막으려 하는시도(이문열. 사람의 아들에서 김동욱이 요셉을 살해하는것)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안에서 그것을, 자신만의 공포로 평생 껴안고 Young Goodman Brown은 눈을 감는다.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것은 실재 존재하는 체제로서의 '청교도적 윤리'앞에서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공론화, 혹은 담론의 장은 청교도적 시대의 사제들에겐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Young Goodman Brown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청교도 주의자들에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 이었고 Young Goodman Brown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은 청교도주의자들이 애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미려 했던 실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이 무슨 사악한 유희인가?
7. 그리하여 Young Goodman Brown은 모파상의 주인공이 목걸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의 허탈감과 영화 현기증의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때의 좌절감과, 신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야 만 어린 성자의 때이른 우울증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8. 그 외의 다양한 비평적 접근방법도 물론 가능하다. 수 많은 이론들이 각기 자신만의 특별한 손짓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기회비용의 원칙은 그래서 항상 아쉬운 무언가를 뒤에 남겨 놓는다. 만약 우리가 이 작품을 전기.역사적 관점에서 다룬다면,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칼뱅이즘(그당시 팽패했던 청교도적 윤리),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하여 얻어낼수 있는 작중 요소의 상징성들이 매우 중요해 질것이고,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짧막한 사사구조가 담지하고 있는 기법적 장치로써 상징과, 은유등 의 수사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이론이 모든 Text에 딱 알맞게 맞아 떨어질 수는 없다. 어떤 작품은 이런 이론적 배경에 특별히 잘 부합하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이론 과 잘 부합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공통적으로 우리가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이론과 분석의 현재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본인은 Nathanniel Hawthorne의 Young Goodman Brown속에서 가급적 현대 담론과의 연계성을 찾아보고자 나름대로 (?)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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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프로이드의 아주 유명한 분석 사례를 잠깐만 살펴보자. 널리알려진 '늑대인간'의 분석 사례는 한 러시아 청년이 겪었던 유아기 노이로제에 관한 것인데, 보고서는 유아기 노이로제가 진행되고있 을 당시의 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진지 15년이 지난 후의 분석결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드는 자신의 분석을 시작하기전 서두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한계를 가정한다. \"노이로제가 있는 아이라면 그 당시에 분석하는 것이 당연히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자료는 풍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말과 개념을 아이에게 너무 많이 빌려주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분석한다 하더라도 가장 깊은 단층은 의식이 파고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성숙한 어른의 기억에 의존하여 유아기의 병을 분석하면 이런 한계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중에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때는 그것을 왜곡하고 새로 꾸민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늑대인간-유아기노이로제에 관하여. 143)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바로 이점이다. 러시아 청년이 어렸을 때 보았을지도 모르는 원초적 성교장면은 그의 신경증적 원인이라고 그의 꿈분석을 통해 제시되었지만, 기실 그것은 상기된 바와 같이 '보았을지도 모르는' 다시 말한다면 사후에 재 구성된 기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형세는 다소 모호해진다. A가 B의 원인이라고 기껏 분석을 해 놓았는데 A가 그 원인이 아닐수도 있다니, 결과는 명백한데 원인의 행방이 묘연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드의 세 가지는 출발한다. 각 가지의 이름은 전이, 사후논리, 그리고 '존재하지 앟았던 것의 상실 혹은 그것의 폭력'이될 것이다.
2.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Young Goodman Brown 의 심부름이 무엇이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마치 꿈처럼.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을 닮은 누군가와 동행을 하며 숲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환영뒤에 불현 듯 Young Goodman Brown 이 깨닫는 것은 차고 축축한 바위의 까칠함뿐, 그때까지 그가 보았던 환상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있고난 후의 Young Goodman Brown의 변화이다. 그는 예전과 다르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심지어 자신의 아내 Faith까지, 의심스럽게 대하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멀리한채 쓸쓸히 죽어간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1690년대 Salem Village에서 자행된 비인륜의 전형이라고할 수 있는 마녀 사냥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실상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들이 저지른 '폭력'은 바로 마녀가 존재해야만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인데, 역사와 과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한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다시말해 존재하지 않는 '마녀' 에 대한 망상이 실제 살아 숨쉬며 투쟁하는 개개의 현실체들에게 현실의 그 어떤 권위와 억압보다 도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역사는 현재까지 이런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의 몸싸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3.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상은 어떻게 가능해 지는가? 어느 사회고 그것이 서로 상이한 욕망의 대상을 지닌,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닌 개개 구성원의 집합을 전제로 할 때는 불가불 규제와 통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규제와 통제의 시초는 대부분의 신화에서(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보여지듯, '금기'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금기의 위반과 그에따른 부수적 정신형성물로써의 죄책감의 관계는 '토템과 타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최초 원시공동체 사회에서 (이것은 물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라는 심리적 현상을 별 의심없이 사용하고 있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누군가가 있다면 본인의 이론은 그에 대해 또 다른 답변을 달갑게 준비해야 하리라.)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의 결과로써 실제적인 아버지에 대한 권위의 전복이 이루어 졌다고 가정해 보자. '아버지 살해'의 근원적인 원인으로서의 양가성이 '아버지 살해'가 행해지고 난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일체화의 열망에서 시작된 애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책'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아버지 살해'에가담한 모든 형제들에겐 이젠 집단 모두가 느끼는 '자책'에 해당하 는 '죄책감'의 의식이 형성된다. 이러한 '죄의식'의 형성은 아버지의 권위를 전복한 형제들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하여금 가해졌던 것과 똑같은, 혹은 더 가혹한 금지를 요구하게 된다. 바로 자신을 폭도로 이끌었던 그 체제의 유물을 자신이 더욱더 확고하게 유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인류 모두가 경험적으로 한 두 번쯤 겪어보았을 '자의식 혹은 죄책감'의 근원은 밝혀진다. 그것은 계통발생적으로 유전되면서 시대와 역사가 필요로 했던 교육, 문화, 도덕 속에 또 다른 형태의 '아버지 권위'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Young Goodman Brown의 경우 그러한 환상은 그 당시의 형식적인(분명히 그 당시의 청교도적 윤리관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닌 있어야할 인간의 모습을 기준으로 재단되었을 것이다.) 청교도적 윤리관에서 기인한 억압의 결과물이다.
4. \"좁은문\"의 가련한 여주인공 알릿사는 괴로워 한다. \"주여, 제 마음의 덕이 부정하는 이 덕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지 그녀에게 부당한 폭력을 가했던 실체는 청교도가 아닌 Protestant 윤리였을 뿐이다. 실제 인간은 정신적인 활동의 영위만으로 그 존재가치를 충분히 획득할 수는 없다. 영혼의 문제가 명백히 존재하듯 그 이면에는 똑같이 육체의 문제가 존재하므로.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가장 큰 명제는 그것 아닐까?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투쟁 혹은 지연된 타협' 신체의 변화에 따른 그 만큼의 정신적인 교육과 배려가 수반되지 않았을 때, 종종 인간은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성에 무지한 순진한 청년이 어느 맑은 5월, 몽정을 겪고났을 때 그는 과연 자신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인가? 보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눈길이 먼저가는 사진속 여인의 나신을 바라보면서, 청년은 과연 죄책감의 그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을까? 죄책감의 멍에를 벗어난 자위행위는 과연 그가 몇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인가?(본인이 남성이기에 남성의 예를 들었다. 매우 첨예한 사항이라 고려되기에 사족같은 단서를 붙인다.) 청년은 자신의 행동이 투명화되어 자신의 가족이나 치눅들에게 알려졌을 때, 실제로 그에게 돌아올 그 만큼의 반응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엄중한 자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것이다. 교육. 그리고 수준에맞는(?) 문화의 단편이 거칠게 엮어놓은 보이지 않는 덫이다.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 그 매개의 변항속에서 이념, 체제, 종교, 인종등 실로 수 많은 유령들이 자리를 차지해 왔었음이 우리 인류 현대사의 무게이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살수는 있지만,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을 수는 없다\" 고. 인간의 것이되 인간적인 것을 거역하는 반란의 테러리스트.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욱 무섭다. 실체가 없기에 대응할수 없으므로.
5.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진리는 그러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에겐 조금 다르다. \"유추가 가능하면, 그것이 재구성될수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동등하다.\" 숲 속의 사건들. 그것은 어떻게 객관화된 실제처럼 Young Goodman Brown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할수 있었는가? 만일 그가 본 환상이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절대 허용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면, 그저 믿지 않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Young Goodman Brown이 지니고 있던 절대적 종교의 믿음을 뿌리까지 뒤흔들던 무엇이 있었다. 개연성이라는 것. 그가 숲속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그는 자신속에서 힘겹게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타인에게 숨겨진 자신 속의 모습을 인간이 직시할때의 그 당혹감이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희랍시대 부터 인간의 의식속에서 공공연한 심리현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희극이건 비극이건, 바로 자신 속의 숨겨진, 혹은 액면 그대로의 또 다른 자신과의 동일시 또는 변별성에서 극의 기능이 시작되는 것 아니던가? 프랑스의 폴 디엘은 '메두사' 신화를 분석하면서 메두사의 상징적 의미를 \"자아가 제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순간에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게 될 때에 허영에 찬 영혼을 포착하는 자아에 관련되는 절망\"(그리스 신화의 상징성. 122-23)으로 해석하고있다. 그리하여 메두사의 얼굴을 직시할 때 형벌로써 따라오는 마비(신화속에서 사람들은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돌로 변한다.)는 자신 에 대한 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햄릿의 부왕이 극중극을 관람할 때의 반응을 상기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Young Goodman Brown은 숲속에 서 부정할수 없는 자신의 개연성을 깨닫는다. '자신 역시도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환상 속의 무리들속에 나도 포함될수 있다는 것' 시간이 가르쳐 주는 가장 평범한 일상의 진리 앞에서 Young Goodman Brown은 자신의 여생과 맞바꿀 만큼의 두려움을 보았던 것이다.
'화해'란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내가 공유하고인정할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역지사지'란 기본적으로 그도 나 같을 수 있고, 나 역시 그와 같을 수 있다는 화해의 논리이지만 Young Goodman Brown에는 자기 파멸의 개연성으로 타나났다. 자신이 형성하지 않은, 순전히 계통발생적 으로 세습되어온 역사, 문화, 도덕적 기준이 그와 마찬가지로 붕괴되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 였던 것이다. 나의 가치 기준이 타인에게 그대로 전도되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말과 행동 이 내 안의 기준으로 재단되는 것. '도라'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면서, 프로이드는 도라의 꿈을 해석하는데 다소 과장된 성징해석과 성적개념을 요구하였다. 결과는 프로이드 자신의 가치개념과 성개념을 도라에게 적용하려 했다는 작위적인 분석이었다. 도라의 분석은 결국 실패로 남겨졌지만, 프로이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전이'의 가능성. 프로이드의 경우 '전이'는 분석과정중에 분석가와 피분석가 간에 개입된 분석외의 현상 이었지만 여기서 본인은 Young Goodman Brown이 열련의 사악한 환상들 속에서 자각한 자신안의 부정한 요소에 대한 개연성을 실제 그가 바라본 현상이 고착된 기정사실로 인정되게 하는 기제로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Young Goodman Brown은 꿈을 꾼 듯 하면서도 그 꿈의 망상적 흔적에 평생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6.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갈망하는 충동의 본원적 대상이 억압의 결과로 상실되었을 때, 끝없이 이어지는 대체물이 그 본원의 대상을 대신하지만 그런 대체물중 그 어느것도 완전한 만족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불륜을 꿈꾸는 심리. 175)
Young Goodman Brown에게 실질적으로 일어난 일은 둘중 하나이거나 둘 다이다.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러나 존재하지 않았던 신앙의 상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을거라 믿었던 자기 내부의 이단적 맹아를 확인하게 되는 것' 우리가 만일 이것을 외상에 해당된다고 말한다면 Young Goodman Brown은 그러한 외상으로부터 얻게 된 충격으로 남은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라고 말을 맺어야 할 것이다.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프로이드는 도처에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자아가 개입된 사후의 논리라는 것을. 늑대인간의 예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사후논리란 본인의 이해수준에서 말해 본다면 현재의 어느 시점까지 축적된 도덕적,미적,경험적 사고가 어느순간엔가 과거의 한 현상으로 소급되어 그 때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일순간에 해소되는 우연적인 또 때로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만일 Young Goodman Brown에게 수수께끼로 남겨진채 해명되지 않은 부분 (실제 유년의 기억은 풀리자 않은 수 많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교육이나 유년의 경험에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해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은채 기억의 저편으로 묻히고 만다)이 있었고 그것이 숲속에서의 일을 계기로 해결되었는데 뜻밖에 현재까지 축적된 Young Goodman Brown의 모든 가치체계, 신념, 종교체계의 초석을 두흔드는 일이 되었다면, 이러한 논리는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것이든 종교에 대한 것이든 그 각각의 독단적 편견이 위험한 것은 그 자체 영역의 사회적 성질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맹목적인 절대성에 서 기인한다. 유년의 Young Goodman Brown이 어른의 성생활에 궁금증을 품고있었다고 가정을 해보자.(굳이 그것이 성생활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둠과 항상 격리되어야 했던 아이들에게 어른과 어둠의 관계는 어떠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어른들의 '성' 의 담론속에서 '아이들'의 자리는 없다. 아이에게 '성'은 일종의 성역이며, 범접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장소로 여겨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숲'의 상징적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이를 테면 '숲'이라고 상징되는 '성역' 속에서 Young Goodman Brown은 '금기시된' 그 무엇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결혼을 할 만큼의 경험적 축적이 가능해 졌을 때 그가 유년에 가졌던 해결되지 않은채 남겨진 그 '수 수께끼'는 풀린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해결, '미로'로부터의 해방은 그때까지 절대 통치자로 군 림하던 절대로써의 체제/권력/종교/믿음을 붕괴 시킨다. 물론 그 붕괴를 토대로하여 다시금 새 문명이 출발하기도 한다.(유진오닐-느릅나무 아래 욕망의 결말부분)그러나 Young Goodman Brown에게 그것은 가혹한 개체로서의 공중분해였던 것이다. 유년의 믿음은 대개 절대적이다. 특히나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음에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될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절대적 믿음에 대한 누수현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적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절대적 가치가 붕괴됨으로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의 폭력'은 극치를 이룬다. 어떻게해서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붕괴를 막으려 하는시도(이문열. 사람의 아들에서 김동욱이 요셉을 살해하는것)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안에서 그것을, 자신만의 공포로 평생 껴안고 Young Goodman Brown은 눈을 감는다.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것은 실재 존재하는 체제로서의 '청교도적 윤리'앞에서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공론화, 혹은 담론의 장은 청교도적 시대의 사제들에겐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Young Goodman Brown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청교도 주의자들에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 이었고 Young Goodman Brown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은 청교도주의자들이 애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미려 했던 실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이 무슨 사악한 유희인가?
7. 그리하여 Young Goodman Brown은 모파상의 주인공이 목걸이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의 허탈감과 영화 현기증의 주인공이 자신의 연인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때의 좌절감과, 신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야 만 어린 성자의 때이른 우울증 속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8. 그 외의 다양한 비평적 접근방법도 물론 가능하다. 수 많은 이론들이 각기 자신만의 특별한 손짓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기회비용의 원칙은 그래서 항상 아쉬운 무언가를 뒤에 남겨 놓는다. 만약 우리가 이 작품을 전기.역사적 관점에서 다룬다면,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칼뱅이즘(그당시 팽패했던 청교도적 윤리),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하여 얻어낼수 있는 작중 요소의 상징성들이 매우 중요해 질것이고,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짧막한 사사구조가 담지하고 있는 기법적 장치로써 상징과, 은유등 의 수사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의 이론이 모든 Text에 딱 알맞게 맞아 떨어질 수는 없다. 어떤 작품은 이런 이론적 배경에 특별히 잘 부합하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이론 과 잘 부합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러한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공통적으로 우리가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이론과 분석의 현재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본인은 Nathanniel Hawthorne의 Young Goodman Brown속에서 가급적 현대 담론과의 연계성을 찾아보고자 나름대로 (?)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