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스토리, "슈퍼스타 최향남"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삼미특수강 공장 근로자로 일하는 사회인 야구 출신인 감사용씨가 82년 연습생 신분으로 삼미슈퍼스타즈 투수가 되는 과정을 그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역사상 최약체의 꼴찌팀에 보잘것 없는 왼손잡이 꼴찌투수의 모습을 슈퍼스타라는 팀명과 대비시킨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이었다.
사실 감사용씨는 이른바 풍운아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점이 많다. 일단 프로야구 선수로 뛴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 82년에 삼미슈퍼스타 소속으로 데뷔하여 청보핀토스, 86년 OB베어스에 잠시 머무르다 은퇴했는데 5년간 현역선수로 뛰면서 61 경기, 181 2/3 이닝, 1승 18패 2세이브, 방어율 6.09이라는 소박한 기록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용씨 히스토리가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드라마틱 했던 것은 포기하지 않는 꼴찌의 노력이라는 그의 삶의 태도 때문이였다. 실제로 그는 프로야구를 떠나서도 대학야구 감독, 장애인 야구 감독등으로 야구에 대한 자신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도전과정에서 또다시 무수한 실패를 경험했지만 말이다. 이런 행보를 통해 감사용씨는 "절망하지 않는 꼴찌"라는 화두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것이 슈퍼스타 감사용의 흥행코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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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남을 보면 문득 "슈퍼스타 감사용"이 떠오른다. 어쩌면 감사용보다 더 풍운아 답다. 진짜 "슈퍼스타 최향남"이 더 어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경이다. 71년생이니 올해 우리나이로 39살이다. 야구선수로는 이제 거의 환갑에 도달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인생의 드라마는 끝날 줄 모른다.
사실 그의 야구인생은 KBS 드라마 "너는 내운명"보다 더 롤러코스터다. 전라도 신안 촌구석에서 느닷없이 야구를 시작한 그는 대학진학을 원했지만 어이없는 행정처리로 진학에 실패한후 당시 해태타이거스에 고졸 신인 선수로 입단한다. 그러나 희한하게 안풀리는 그의 야구인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갔는데 방위도 상무도 아니라서 현역으로 갔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로 현역입대를 한 경우는 상당히 드문 경우다. 운동선수가 3년을 포병부대에 군인으로 활동한다는 건 선수를 포기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최향남은 3년동안 죽을 힘들 다해 군대에서 러닝운동을 해서 제대후 선수로 복귀한다.
해태에서 엘지로 이적하면서 최향남의 인생에 꽃이 피나 싶더니 머리한번 물들인것으로 쫑코 먹고 그냥 내리막길을 탄다. 그때부터 최향남의 역마살이 도지기 시작했다. 최향남은 미국 MLB 진출을 노리고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최향남의 도전은 박찬호나 김병현 서재응 같은 도전이 아니다.
그들은 극동 스카우터에게 스카웃되어 MLB에 뛰게 되는 것이지만 최향남은 무작정 자기가 짐을 싸서 그들에게 연습생으로 뽑아달라고 조르는 식이라는 거다. 결국 LB 트라이아웃에서 밀리면 아무런 보장도 없이 개 신세가 되어 터덜터덜 국내로 돌아와야 하는 신세가 된다. 차라리 그냥 국내에 있었으면 연차에 따른 보상을 적절히 받을 수 있는데 그런거 홀라당 다 포기하고 훌쩍 떠난거다.
결국 몇해를 반노숙자 신세로 전전 하다가 가까스로 클리블랜드 산하 마이너리그에 정착하여 8승5패 방어율 2점대의 호성적을 거둔다. 최향남은 꿈에 그리던 MLB 입성을 눈에 앞두는가 했는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최향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할만큼 했다고 생각한 최향남은 대실망을 않고 국내로 다시 복귀한다.
그러나 믿었던 SK는 계약을 포기한다는 소식을 통보하고 오도가도 못한 최향남은 또 길잃은 신세가 되는데 롯데의 계약에 간신히 자리를 잡는다. 07년 첫해 5승12패 무참한 성적인데 롯데구단의 배려로 마이너스 옵션은 면한다. 그리고 08년 시즌 2승4패 9세이브, 방어율 3.58. 끊임없이 불안하던 롯데의 마무리를 맡아 "향운장"의 포스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웬만하면 39살이라는 나이도 있고 이젠 국내팀에서 슬슬 운동하다가 은퇴후 지도자를 노리는게 맞을 듯 한데, 최향남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또 미국진출을 노리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일종의 병이다. 포기를 모르는 병 말이다. 그렇다 최향남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자신이 하고픈일이 있다면 결코 도전을 멈추지 않는 남자, 그 이름이 바로 최향남이다.
최향남, 세인트루이스행 사인만 남았다
14일 미국에서 돌아온 최향남은 MLB가 신분조회한 구단은 세인트루이스 라고 밝히고 곧 계약이 임박했다고 전했다. 햐..징하다. 최향남, 드디어 메이저의 꿈을 이루는 구나. 감히 말하건데 "슈퍼스타 감사용" 2탄은 분명히 최향남의 몫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슈퍼스타 최향남"이라는 영화를 찍어도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된다.
부디 미국에서도 그 특유의 빠른템포와 거침없이 내지르는 직구 스타일의 투구를 맘껏 뽐내길 바란다.
슈퍼스타 최향남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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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남의 야구 일대기
전남 신안 촌구석에서 태어남
초등학교때 야구부 창설 -> 반마다 한명씩 의무 차출 -> 엉겁결에 야구 선수 됨
중학교 때 투수 전향 -> 못 먹고 몸이 약해 공이 느림
삐쩍 말라서 잘못 때렸다가는 죽을 것 같아 선배들이 구타 면제
고등학교 때부터 몸이 좋아져 공 빨라짐 -> 에이스
하지만 팀은 약체 -> 좀처럼 본선에 나가지 못함
해태에서 거액 제시 -> 거절하고 동국대행 선택 -> 서울 가서 미리 훈련 참가
담임이 체육 특기생을 보내본 적이 없어 일반 학생 원서를 내서 동국대 불합격
선생님이 미안하다며 가방을 선물해주심
->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것은 이때부터라고 훗날 회고
막노동판 전전하다가 귀향
끈 떨어진 조롱박이 되자 해태에서 금액 후려침 -> 울며 겨자먹기로 사인
해태 입단후 방장 고참에게 캐갈굼당함
프로 데뷔 시즌(1990년) -> 5경기 0승 1패, 방어율 15.19
현역 입대 영장 나옴
고장난 부위를 샅샅이 뒤져도 약체팀에서 혹사당한 적이 없어 사지 멀쩡 -> 현역 입대
연천 포병 부대 배치 -> 야구 밖에 모르는 바보라 고문관 됨
타고난 운동 신경으로 군인체육대회에서 좋은 성적 거둠 -> 개인 훈련 시간 주어짐
공 던질 환경이 되지 않아 매일 2시간씩 러닝만 함
제대 후 해태로 복귀 -> 러닝으로 강해진 하체 덕분에 구속 증가
상체 훈련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오랜만에 공을 잡아 신나게 던지다가 어깨 다침
어깨 회복 후 구위 증가 -> 3선발 낙점
2년간 1승 5패 -> "불펜 선동렬", "새가슴"이란 별명 얻음
트레이드되고 싶어 그간 트레이드된 선수들의 면면을 관찰
-> 하나같이 문제아들이라는 공통점을 찾음
장고 끝에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사표 제출
->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사표쓴 역대 최초의 선수
황당해진 구단에서 트레이드 작업 착수 -> LG로 트레이드
-> 속으로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함
2년간 20승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떠오름
어느날 머리 중간에 고속도로로 노란색 아파치 염색하고 등장 -> 선수단 발칵 뒤집힘
코칭스태프가 염색머리 바꾸라고 지시 -> 다음날 머리 전체를 노랗게 염색하고 나타남
(본인은 가운데만 노랗게 염색한게 문제가 된 거 같아 통째로 노랗게 한 것 뿐이라고 항변)
그날이후 코칭스태프에 제대로 찍혀서 성적 내리막길 -> 이때부터 미국 진출 모색 시작
고민 끝에 세미프로골프대회에 응시하겠다는 핑계를 지어내 방출 요청
-> 감독의 만류로 1년 더 잔류
결국 구단에서 방출시켜줌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트라이아웃 참가 -> 탈락
라뉴 베어스 입단 테스트 -> 무소식 -> KIA 복귀 후에야 연락와서 못감
KIA 재입단 -> 해외진출시 무조건 풀어주는 조건으로 계약함
다음해 2월 LA 다저스 트라이아웃 참가
-> 에이전트가 계약될꺼같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함
그 말만 믿고 미국에서 3개월동안 여기저기 떠돌며 떠돌이생활 -> 결과는 꽝
귀국해서 다시 KIA 복귀 -> 2년간 4승 6패 1세이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입단 테스트 제의 -> 산하 트리플 A 버팔로 바이슨스 입단
8승 5패 2.37의 준수한 성적 -> 메이저 진입 실패 -> 재계약 실패
국내 복귀 타진 -> SK와 구두 계약 -> 계약 취소
롯데와 계약 -> 8승 미만시 마이너스 8천만원 (연봉 2천) 옵션
07년 시즌 5승 12패, 방어율 5.00 -> 구단 배려로 마이너스 옵션은 면함
* 출처 : 인터넷 게시판에 떠도는 최향남의 야구 일대기